“삶 마디마디 맺힌 매듭풀고… 화해하고 편안히 떠나는게 ‘존엄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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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063회 작성일 09-06-18 11:45본문
“죽음은 떠나는 자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남은 자들의 사건입니다. 말기 환자가 삶을 얼마나 존엄하게 마무리 짓는가에 따라 남은 가족의 행·불행이 뒤바뀌고 삶의 질이 달라지거든요.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시기에 생명운동이자 안락사 예방운동으로서 호스피스는 중요합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안에 위치한 성바오로 가정호스피스센터. 죽음으로의 여정 위에 놓인 말기 환자들의 마지막 동행자이자 환자 가족들의 보호자로 30년을 살아온 노유자(66·쟌 드 마리 수녀) 센터장을 지난 15일 센터에서 만났다. “호스피스를 하면서 돌아오는 것은 울음뿐”이라지만 정작 수녀는 밝고 호탕한 웃음으로 센터를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녀님을 못 만나고 죽었다면 억울했을 것”
노 수녀의 촘촘한 일상은 연예인 못지않다. 무료 가정방문을 통해 돌보고 있는 말기 환자는 17명. 1주일에 2∼3회씩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로 구성된 호스피스팀을 이끌고 환자들을 찾아나선다. 환자의 몸과 마음,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일은 물론 가족들과의 화해, 이별준비를 돕는 게 그의 소명이다. ‘애프터서비스’도 중요하다. 세상을 떠난 환자의 영안실과 장례식, 삼우제, 기일을 챙기는 일은 당연한 예의다. 슬픔에 잠긴 사별가족의 전화 상담 역시 중요한 일과다. 15년 된 사별가족이 지금껏 연락을 해온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의 벽을 넘어 전국 각지에서 호스피스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 수녀는 지방으로 강의를 떠날 때 사별가족을 동행시키기도 한다. 자동차는 또하나의 달리는 상담소가 되기 때문이다. 기자와의 인터뷰도 호스피스센터에서 시작해 달리는 자동차 안으로 이어졌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도 수녀의 몫이다. 외출이 쉽지 않은 환자들을 데려와 수녀원 정원을 산책시키는 일, 미술, 원예, 음악, 아로마 치료 등을 해주는 것도 센터에서 이뤄진다. 소명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수녀는 “호스피스를 통해 환자가 가족 곁에서 공경과 사랑 속에 삶을 의미있게 마무리 짓는 모습은 자녀들에게 외국 유학보다 큰 교육효과가 있다”고 자부한다.
“말기 환자가 호스피스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갖고 진심이 담긴 유언을 남겨 보세요. 칼 들고 나갔을지 모르는 자식도 칼자루를 떨어뜨리게 돼 있어요. 그러니 호스피스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운동이 됩니다.”
1970년 간호 수녀로 시작해 가톨릭대 간호학과 교수, 가톨릭대 성모병원 수간호사, 성바오로 병원장 등이 맡겨질 때마다 “울면서 끌려갔다”는 수녀는 환자를 직접 돌보는 꿈이 이뤄진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했다. 호스피스 전문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38년 전. 간호수녀로 돌봤던 간암 말기의 34세 미혼여성이 “수녀님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너무 억울했을 거예요. 앞으로도 저와 같은 환자를 많이 도와주시고 하늘나라에서 반갑게 만나요”라고 했던 유언이 그를 인도했다. 80년대 의사 간호사 등을 모아 호스피스 운동을 펼쳤던 수녀는 꾸준히 각국의 호스피스 학회를 탐방하다 2002년 아예 교수생활을 퇴직하고 유럽에 호스피스 연수를 2년간 다녀왔다. 그리고 가정호스피스센터를 개관한 게 2007년 3월이다.
최근 시행을 앞두고 있는 존엄사 문제에 대해 수녀는 “주관적이고 개별적이어야 한다”면서 “가족, 경제적 상황, 체면 때문이 아닌 환자 본인의 생명 의지가 반영될 수 있도록 의사결정 대리인 선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한 말기 환자가 가족들에겐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말해놓고 제겐 귓속말로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제 아파죽겠어도 오늘 다시 살고 싶은 게 본능이죠. 하나를 가진 사람이나 백개를 가진 사람이나 내려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괴로우니까 죽고자 하는 건데, 고통을 한껏 줄여줘서 끝까지 잘 살도록, 편안히 떠나도록 돕는 게 호스피스예요.”
#존엄한 삶은 존엄한 죽음에서 시작돼
삶의 마디마다 맺힌 매듭을 풀고 화해 속에 “사랑합니다” 껴안고 떠나게 하는 일은 호스피스의 가장 큰 보람이다. 수녀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못다 이룬 일에 대한 후회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을 괴로워하더라”고 했다. 수녀는 암에 걸린 40대 남자가 죽기 전에 부인이 소원하던 혼배성사를 올리도록 도왔고 행복해하던 그들 부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유럽에서 언어장애가 있는 말기 환자가 죽기 전까지 엄마, 아빠 두 단어를 발음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호스피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의 평생 희망을 죽기 전에 이루도록 도와주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호스피스는 말기 환자들에게 남은 인생을 원없이 살아보도록 돕는 한 편의 연극 예술이고 드라마입니다.”
호스피스 활성화를 위해 수녀의 마음은 바쁘다. 호스피스 병동과 가정 호스피스가 유기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독립 호스피스센터가 국내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성바오로 호스피스센터도 현재 100% 개인 후원에 의지해 무료로 운영돼 병동 건립은커녕 재정난에 시달린다. 유급으로 상근 간호사와 의사를 두고 맘껏 환자들을 찾고 싶지만 아직 욕심뿐이다. “아일랜드에서는 호스피스를 거쳐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가망 없는 치료에 매달려) 환자를 고생만 시켰다는 가족들의 후회와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은데,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는 일도 과제예요.”
규모에 치중하는 우리의 장례문화도 장애다. 수녀는 “죽은 후 대형 병원의 장례식장과 화환장식에 치중하느라 장례식의 전도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대학병원 4인실이나 6인실, 중환자실에서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이별 인사가 충분히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임종방 같은 병원 측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안에 위치한 성바오로 가정호스피스센터. 죽음으로의 여정 위에 놓인 말기 환자들의 마지막 동행자이자 환자 가족들의 보호자로 30년을 살아온 노유자(66·쟌 드 마리 수녀) 센터장을 지난 15일 센터에서 만났다. “호스피스를 하면서 돌아오는 것은 울음뿐”이라지만 정작 수녀는 밝고 호탕한 웃음으로 센터를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녀님을 못 만나고 죽었다면 억울했을 것”
노 수녀의 촘촘한 일상은 연예인 못지않다. 무료 가정방문을 통해 돌보고 있는 말기 환자는 17명. 1주일에 2∼3회씩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로 구성된 호스피스팀을 이끌고 환자들을 찾아나선다. 환자의 몸과 마음,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일은 물론 가족들과의 화해, 이별준비를 돕는 게 그의 소명이다. ‘애프터서비스’도 중요하다. 세상을 떠난 환자의 영안실과 장례식, 삼우제, 기일을 챙기는 일은 당연한 예의다. 슬픔에 잠긴 사별가족의 전화 상담 역시 중요한 일과다. 15년 된 사별가족이 지금껏 연락을 해온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의 벽을 넘어 전국 각지에서 호스피스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 수녀는 지방으로 강의를 떠날 때 사별가족을 동행시키기도 한다. 자동차는 또하나의 달리는 상담소가 되기 때문이다. 기자와의 인터뷰도 호스피스센터에서 시작해 달리는 자동차 안으로 이어졌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도 수녀의 몫이다. 외출이 쉽지 않은 환자들을 데려와 수녀원 정원을 산책시키는 일, 미술, 원예, 음악, 아로마 치료 등을 해주는 것도 센터에서 이뤄진다. 소명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수녀는 “호스피스를 통해 환자가 가족 곁에서 공경과 사랑 속에 삶을 의미있게 마무리 짓는 모습은 자녀들에게 외국 유학보다 큰 교육효과가 있다”고 자부한다.
“말기 환자가 호스피스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갖고 진심이 담긴 유언을 남겨 보세요. 칼 들고 나갔을지 모르는 자식도 칼자루를 떨어뜨리게 돼 있어요. 그러니 호스피스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운동이 됩니다.”
1970년 간호 수녀로 시작해 가톨릭대 간호학과 교수, 가톨릭대 성모병원 수간호사, 성바오로 병원장 등이 맡겨질 때마다 “울면서 끌려갔다”는 수녀는 환자를 직접 돌보는 꿈이 이뤄진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했다. 호스피스 전문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38년 전. 간호수녀로 돌봤던 간암 말기의 34세 미혼여성이 “수녀님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너무 억울했을 거예요. 앞으로도 저와 같은 환자를 많이 도와주시고 하늘나라에서 반갑게 만나요”라고 했던 유언이 그를 인도했다. 80년대 의사 간호사 등을 모아 호스피스 운동을 펼쳤던 수녀는 꾸준히 각국의 호스피스 학회를 탐방하다 2002년 아예 교수생활을 퇴직하고 유럽에 호스피스 연수를 2년간 다녀왔다. 그리고 가정호스피스센터를 개관한 게 2007년 3월이다.
최근 시행을 앞두고 있는 존엄사 문제에 대해 수녀는 “주관적이고 개별적이어야 한다”면서 “가족, 경제적 상황, 체면 때문이 아닌 환자 본인의 생명 의지가 반영될 수 있도록 의사결정 대리인 선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한 말기 환자가 가족들에겐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말해놓고 제겐 귓속말로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제 아파죽겠어도 오늘 다시 살고 싶은 게 본능이죠. 하나를 가진 사람이나 백개를 가진 사람이나 내려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괴로우니까 죽고자 하는 건데, 고통을 한껏 줄여줘서 끝까지 잘 살도록, 편안히 떠나도록 돕는 게 호스피스예요.”
#존엄한 삶은 존엄한 죽음에서 시작돼
삶의 마디마다 맺힌 매듭을 풀고 화해 속에 “사랑합니다” 껴안고 떠나게 하는 일은 호스피스의 가장 큰 보람이다. 수녀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못다 이룬 일에 대한 후회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을 괴로워하더라”고 했다. 수녀는 암에 걸린 40대 남자가 죽기 전에 부인이 소원하던 혼배성사를 올리도록 도왔고 행복해하던 그들 부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유럽에서 언어장애가 있는 말기 환자가 죽기 전까지 엄마, 아빠 두 단어를 발음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호스피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의 평생 희망을 죽기 전에 이루도록 도와주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호스피스는 말기 환자들에게 남은 인생을 원없이 살아보도록 돕는 한 편의 연극 예술이고 드라마입니다.”
호스피스 활성화를 위해 수녀의 마음은 바쁘다. 호스피스 병동과 가정 호스피스가 유기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독립 호스피스센터가 국내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성바오로 호스피스센터도 현재 100% 개인 후원에 의지해 무료로 운영돼 병동 건립은커녕 재정난에 시달린다. 유급으로 상근 간호사와 의사를 두고 맘껏 환자들을 찾고 싶지만 아직 욕심뿐이다. “아일랜드에서는 호스피스를 거쳐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가망 없는 치료에 매달려) 환자를 고생만 시켰다는 가족들의 후회와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은데,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는 일도 과제예요.”
규모에 치중하는 우리의 장례문화도 장애다. 수녀는 “죽은 후 대형 병원의 장례식장과 화환장식에 치중하느라 장례식의 전도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대학병원 4인실이나 6인실, 중환자실에서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이별 인사가 충분히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임종방 같은 병원 측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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